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역사/바사 왕조 (문단 편집) ======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입과 에르데이 공국의 이탈 ====== 피난을 떠난 얀 2세 카지미에시가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미 얀 2세 카지미에시는 AD 1656년 12월 1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빈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병력 지원은 4,000명에 불과하여 불만족스러워했고 AD 1657년 4월 페르디난트 3세가 사망하면서 그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얀 2세 카지미에시는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로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레오폴트 1세]]와 다시 협상을 벌여 AD 1657년 5월 27일 다시 한번 빈 조약을 체결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 병력을 12,000명을 늘리는 대신에 유지 비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부담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AD 1657년 6월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의 [[황제군|오스트리아군]]이 폴란드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덴마크를 상대하기 위해 떠났던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57년 6월 20일 폴란드 내의 잔여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구스타브 오토 스텐보크에게 라코치 지외르지 2세를 포기하고 [[슈테틴]]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다급해진 라코치 지외르지 2세도 서둘러 에르데이 공국으로 귀환하고자 했으나 7월 11일 르부프 근처의 마기에루브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후 7월 20일 포돌리아에서 벌어진 차르니 오스트루브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3일 뒤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서 지외르지 2세 라코치는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하며 그동안 점령했던 크라쿠프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를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한 뒤에야 겨우 에르데이 공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AD 1657년 7월 26일 에르데이 공국의 잔존병이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에게 스카와트에서 포위를 당했기 때문에 홀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에르데이 공국의 병력 25,000명이 전사하거나 타타르족의 포로가 되면서 완전히 괴멸되었다. 하지만 라코치 죄외르지 2세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는 데 에르데이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기를 원하던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4세]]가 라코치 죄외르지 2세가 제멋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격한 것을 핑계로 에르데이 공국을 공격하면서 라코치 지외르지 2세는 폐위당했다. 이후 라코치 지외르지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아 복위와 폐위를 반복하지만 AD 1660년 5월 최종적으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